지난 달 필리핀 마닐라 출장 중에 우연히 들른 리잘 공원(Rizal Park)에서 한 인물의 흔적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조제 리잘(José Rizal). 필리핀의 국민 영웅이자 동남아시아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그의 이야기가 제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건, 아마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와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 같네요.
리잘은 19세기 말 필리핀의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의사이자 작가였던 그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필리핀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죠. 그의 삶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됐지만, 그가 뿌린 독립의 씨앗은 결국 필리핀의 자유를 이끌어냈습니다.
오늘은 제가 현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리잘의 생애를 함께 돌아보려고 합니다. 한 세기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그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조제 리잘의 어린 시절과 교육
조제 리잘의 이야기는 19세기 스페인 식민지 필리핀에서 시작되는데요. 1861년 6월 19일, 라구나 주 칼람바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지적 호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지 출장 중에 들른 리잘 생가 박물관을 보면서 느낀 건데, 그의 성장 환경이 꽤 특별했더군요. 열두 형제 중 일곱 번째였던 리잘은 당시 필리핀 상류층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의 교육관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아버지 프란시스코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어린 리잘에게 직접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고, 어머니 테오도라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었다고 합니다. 최근 한 연구를 보니 당시 필리핀 상류층 자녀 중에서도 15% 정도만이 이런 수준의 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하네요.
칼람바와 비나안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리잘은 마닐라의 아테네오 무니시팔 대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흥미로운 건, 그가 공부만 잘한 게 아니라 이 시기에 필리핀의 식민지 현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점이에요. 제가 보기에 이런 그의 문제의식이 나중에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유럽 유학과 혁명적 사상 형성
리잘의 유럽행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해외 유학 경험과 묘하게 겹쳐 보이네요. 1882년, 21살의 젊은 나이에 유럽으로 건너간 리잘은 처음에는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계몽사상과 자유주의가 활발히 논의되던 시기였는데, 이런 지적 분위기가 리잘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유럽 유학생들의 회고록을 보면, 19세기 후반 유럽의 진보적인 학문 환경이 아시아 유학생들의 시야를 넓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더군요.
특히 눈낄 끄는 점은 리잘이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돌아다니며 단순히 의학 공부에만 매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는 각국의 언어를 익히고 문화를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럽의 정치 체제와 사회 구조를 깊이 있게 관찰했습니다. 스페인과 독일에서는 병리학과 안과학을 전공하며 의사로서의 전문성도 쌓았고요.
이 시기에 리잘은 필리핀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노리 메 탕헤레』는 바로 이때 쓰여진 건데, 이 소설이 필리핀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요. 제가 보기에 유럽에서의 경험은 리잘이 식민지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독립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작품 『노리 메 탕헤레』의 출간과 민족적 자각
예전 마닐라의 인트라무로스 지역에서 본 리잘 박물관에서 『노리 메 탕헤레』의 초판본을 실물로 볼 수 있었는데요. 1887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필리핀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당시 필리핀의 식민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필리핀 사회의 부패와 불평등을 날카롭게 비판했죠.
소설의 주인공 크리스토모 이바라는 리잘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하는데요. 최근 한 문학 연구가의 분석에 따르면, 이바라의 성장 과정과 고뇌는 리잘의 실제 경험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해요. 특히 흥미로운 점은 소설이 스페인어로 쓰였다는 건데, 이는 필리핀의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 리잘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스페인 식민 정부는 이 소설을 위험한 것으로 판단해 즉시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탄압이 소설의 영향력을 더 키웠다고 하네요. 지하 독서모임을 통해 책의 내용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필리핀인들의 민족의식을 깨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필리핀으로의 귀환과 독립 운동 참여
유럽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온 리잘의 행보가 흥미로운데요. 제가 살펴본 바로는, 그는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닌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라 리가 필리피나'라는 단체를 만들어 평화적인 방식으로 필리핀의 독립을 추구했죠. 당시 필리핀 역사 자료를 보면, 이 단체가 추구했던 것은 과격한 혁명이 아닌 교육과 계몽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였다고 해요.
하지만 스페인 당국은 리잘의 이런 온건한 접근마저도 위협으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그를 체포해 민다나오의 다피탄으로 유배 보냈거든요. 재미있는 건, 유배지에서도 리잘은 자기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다피탄 주민들의 증언록을 보면, 리잘이 그곳에서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고, 틈틈이 주민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고 하네요.
특히 인상적인 건 리잘이 늘 강조했던 '교육을 통한 해방'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는 필리핀 사람들이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면 먼저 지식과 교양을 갖춰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런 그의 신념은 당시 필리핀 민중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실제로 이 시기에 민족의식이 크게 고양되었다고 합니다.
체포와 사형 선고
1896년의 마지막 달은 필리핀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였던 것 같네요. 제가 얼마 전 마닐라의 루네타 공원(현 리잘 공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리잘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기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카티푸난의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스페인 당국은 리잘을 독립운동 선동 혐의로 체포했는데, 사실 리잘은 늘 평화적인 방법으로 변화를 추구했다고 해요.
재판 기록을 보면 꽤 흥미로운 부분이 있더군요. 군사재판에서 리잘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그가 사형 집행 전날 밤에 쓴 시 '나의 마지막 작별'은 당시 상황의 절절함이 잘 담겨있어요. 최근 한 문학평론가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에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함께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이 깊이 담겨있다고 하네요.
1896년 12월 30일 새벽, 마닐라의 루네타 공원에서 그의 생은 마감됐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리잘의 죽음은 필리핀 독립운동에 새로운 불씨를 지폈고, 결국 1898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이어졌어요. 지금도 매년 12월 30일이면 수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그를 기린다고 합니다.